-젊은 사회학자가 쓴 울산 보고서 대박
-조선-자동차-석유화학의 재고도화 불가능한가?
-박정희-오원철-정주영-이병철-신격호의 꿈 잊지 말아야
“올 상반기 내가 만난 책 중엔 이게 으뜸이야. 서평도 쓸테니까 기다려봐. ”한 달 전부터 SNS를 통해 친구들에게 이 책을 띄워왔다. 종종 책 표지 사진까지 보내줬지만 예상했던대로 반응은 멀뚱멀뚱하거나 시큰둥했다. 학술서 냄새가 풍기기 때문일까? <울산 디스토피아 :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양승훈 지음, 부키 펴냄)이 문제의 책이다.
지금도 내 판단엔 변함없다. 저자 양승훈 교수는 경남 마산의 경남대에 재직 중인 젊은 사회학자(1982년생)인데, 바로 이런 게 살아있는 학문의 표본이다. 넘치지도 모자르지도 않는 책의 만듦새와 본문 편집도 꽤 안정적이다. 이 분야 베테랑 에디터의 손길이 닿았다는 뜻이고, 아직은 이 나라 지식사회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말도 된다.
아무렴. 아직도 단행본은 콘텐츠의 출발점이 맞다. 내 경우 <울산 디스토피아>를 읽는 짬짬이 저자가 5년 전에 펴냈던 그의 출세작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오월의봄 펴냄)까지 구입해 훑어봤다. 그 책은 당당하게 “2020년 한국출판문화상 저술교양 부문 수상작, 2019년 세종도서 교양부문 우수작”이란 띠지를 두르고 있다. 하지만 내겐 이번 신작이 더 좋았다.
시야가 보다 입체적이고 너른데다가 문장 역시 탄력적이다. 그새 저자가 진화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실제로 전작(前作)이 거제도의 조선산업만 다뤘다면 이 책은 이웃 도시 울산의 조선산업-자동차산업-석유화학 등 3대 산업에서 밥을 먹는 사람 모두가 대상이다. 현대차-현대중공업을 포함해 모두 7300여개 회사를 포괄하고 18만 명 근로자를 다룬다.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그래보니 산업보고서 같은 책인 듯한데 뭐가 재밌다는 거지?”
이유가 있다. 울산에서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먹여 살려온 근로자 18만 명의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 그리고 그들의 애환과 땀 냄새까지 이 책에서 감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살아있는 사회학 분야 저술이다. 울산을 움직여온 주인공들이 통계수치 속에 추상화된 존재로 등장하는 게 아니고, 그들의 과거와 오늘 그리고 꿈까지 짐작할 수 있으니 대박이다.
그래보니 지방 도시이고 한반도 동남권(부산-울산-경남) 얘기가 아니냐고 누구는 되묻겠지만, 그건 당신이 울산의 역사와 족보를 몰라서 하는 소리다. 울산은 저자의 표현대로 대한민국 산업 수도다. 이웃 거제와 함께 세계 조선산업의 챔피언인가 하면, 자동차산업과 석유화학산업 역시 각각 세계 최고 수준이다.
맞다. 1950년대 미국 왕년의 자동차 도시인 디트로이트는 잊어달라. 독일의 최대 자동차 도시인 슈투트가르트(벤츠)와 볼프스부르크(폭스바겐) 뮌헨(BMW)도 울산 앞에서 서면 빛 바랜다. 빅토리아 시대 해양강국이던 영국의 조선산업을 상징했던 맨체스터-뉴캐슬-글래스고 등도 따돌린 지도 아주 오래다. 미안하다. 한때 일본의 조선산업을 대표했던 나가사키나 스웨덴의 말뫼 역시 울산에 비하면 많이 시시하다.
그들 도시들은 예외 없이 단 한 가지만 잘했다면, 울산은 유례없는 종합 챔피언이다. 스포츠로 치면 권투-육상-축구까지 몽땅 일등이다. 그래서 세계 제조업의 최상위 클러스터(연관산업이 한 곳에 모인 곳)의 중심축이다. 놀랍게도 이런 도시는 지구상에 없다. 1970년대 초 박정희의 그 유명한 중화학공업 선언 이후 어쨌거나 대한민국 국가발전 전략의 총화다.
너무 거창해서 실감이 덜할까? 실은 “개들도 1만원권을 물고 다닌다”는 말싸움에서 거제와 울산은 서로 자기가 원조라고 우긴다. 그런데도 양승훈의 책 <울산 디스토피아>은 왜 제목이 저렇게 칙칙하지? <울산 찬가> 내지 <울산 유토피아>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그런 내용까지 다 밝히면, 영화 스토리를 까발리는 스포일러라는 말을 들을까봐 여기서 일단 멈춘다.
단 그런 울산이 어느 시점부터 시름시름 앓고 있고, 인구 115만 명을 정점으로 뒷걸음을 치고 있다는 게 저자의 문제의식이다. 결정적으로 울산 3대 산업의 두뇌 즉 기획-구상 기능을 담당하는 연구소와 엔지니어링 센터가 대부분 수도권으로 이전했다. 그통에 울산은 자족적인 산업도시에서 하청 생산기지의 하나로 추락하기 일보 직전이다.
<울산 디스토피아>에는 그런 함정에 빠져들지 않고 울산이 지속가능한 도시로 뻗어나가는 방략을 제시한다. 이 나라가 제조업 강국의 깃발을 내릴 수 없다면, 울산 문제 해결에 초집중해달라는 호소가 이 책에 깔려있다. 실제로 대한민국은 국민총생산(GDP)의 27% 이상을 제조업을 통해 벌어들이는 나라다. 우리보다 제조업 비중이 높은 나라는 딱 한 곳 아일랜드뿐이란다.
총고용에서 차지하는 우리나라 제조업의 비중도 무려 25%다. 독일(27%)이나 이탈리아(26%)와 어깨를 겨룬다. 그렇다면 제조업의 고도화, 즉 산업도시 울산 재도약의 꿈에서 시작할 수는 없을까를 되묻는 건 당연하다. AI와 ICT를 연계한 4차 산업혁명 역시 울산이 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목소리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무 것도 없던 1970년대에도 했는데, 지금 왜 못해?
울산이 살아난다면, 그걸 모델로 포항-창원-거제를 거쳐 광양-여수-영암-군산-광주 등 호남권 그리고 당진 등 충청권으로 이어지는 한반도 산업도시 그룹의 멋진 상생 모델로 작동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건 스릴 넘치는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나라에 그런 큰 그림을 그릴 동력이 아직 남아있나 하는 질문은 다음에 다시 하기로 하자. 다만 저자의 지적을 지식사회와 윤석열 대통령 등 정치권이 흘려듣지 말길 바랄 뿐이다.
“나라가 제조업 강국이 되는데 있어 중화학공원화와 울산의 역할은 분명한 것이었다. 우리는 누구였고, 그들의 꿈은 어떻게 되었나? 먼저 세계 일류 자동차-조선-석유화학 제품을 생산해 수출 주도 경제를 만들려 했던 오원철이나 1세대 중화학공업화의 설계자인 테크노크라트와 정주영-이병철-신격호 같은 자본가가 가진 울산의 꿈이 있었다.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이 수십 조 원을 수출하기까지 그 꿈은 50년에 걸쳐 이뤄졌다. 하지만 ... 지금 그 꿈이 위태로워지고 있다.”(408~409쪽)
요즘 신문방송에는 조선산업이 2008년 이후 슈퍼 사이클(초호황기)을 맞고 있다고 완전 호들갑이다. 한화오션-삼성중공업-HD한국조선해양 등 조선 빅3가 1분기 동시 흑자를 냈다는 얘기다. 현대기아차도 용틀임이 한창이란다. 좋다. 이런 흐름이 ‘축복을 가장한 디스토피아’로 끝나지 않으려면 즉 일시적 흥분에 그치지 않으려면 <울산 디스토피아>를 읽는 게 답이다.
칼럼니스트 소개
조우석
현) 평론가
전) KBS 이사
전)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
전) 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
전) 문화일보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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